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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가보 총리,캄보디아 태황부부와 국왕 만나 본문

Guide Ear&Bird's Eye/미얀마[버마]

온가보 총리,캄보디아 태황부부와 국왕 만나

CIA Bear 허관(許灌) 2012. 1. 22. 16:44

 

        2012년 1월 20일, 온가보 중국 국가 총리 캄보쟈  태황 노로돔 시하누크, 태후 노로돔 모니카 시하누크 그리고 국왕 노로돔 시하모니를 만나

중국의 설명절에 즈음해 온가보 총리가 20일 베이징에서 캄보디아 태황 노로돔 시하누크, 태후 노로돔 모니카 시하누크 그리고 국왕 노로돔 시하모니를 찾아 호금도 주석부부의 인사를 전하고 행복과 건강을 기원했습니다. 온가보 총리는 캄보디아 태황부부와 국왕이 양국간 친선을 위해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높이 평가하고 양국의 친선은 여러가지 시련을 이겨냈고 점점 활력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온가보 총리는 쌍방의 공동노력이 있기에 양국관계는 더욱 활력적으로 발전해 갈것이라고 전망했습니다.

시하누크 태황부부와 시하모니 국왕은 호금도 주석부부에게 드리는 따뜻한 문안과 아름다운 축복을 전해줄것을 온가보총리에게 부탁했습니다. 이들은 또 온가보 총리가 자신들을 찾아 문안을 한데 대해 진심으로 되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으며 중국인민들에게 설명절의 축복을 전했습니다. 이들은 중국이 용의 해에 더욱 번영하고 양국 우호협력관계가 더 크게 발전하기를 기원했습니다.

 

 

1960년대 베트남 전쟁에서 중립노선을 취했다. 아버지는 노로돔 수라마리트 공이었고 어머니는 1904~27년 캄보디아 왕을 지낸 시소와트의 딸 코사마크 네아리라트 공주였다.

노로돔 시하누크는 1922 10 31일 프놈펜에서 출생했다. 프놈펜 에꼴 프랑수와 부동 (Ecole Francois Baudoin) 초등학교를 마치고 사이공 (現 호치민市)에서 중등교육을 받았다(1941 4 23일 외할아버지인 시소왓 모니봉 국왕이 사망하자 국왕추대평의회(Throne Council)는 사이공에서 고교 3학년을 다니고 있던 시하누크를 캄보디아 국왕으로 선출했다)

1941년 시소와트의 아들인 모니봉 왕이 죽자 왕위에 올랐는데 그때 나이 18세였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젊은 혈기에 일본인에게 고무되어 프랑스로부터 캄보디아의 독립을 선언하려 했으나, 프랑스군이 다시 들이닥치자 1954년 프랑스가 인도차이나에서 물러나기까지 기다렸다. 1955년 1월 사회주의인민공동체를 결성하고 2월 국민투표를 통해 그 계획을 인정받았으며, 3월 2일 아버지를 왕으로 만들기 위해 사퇴했다가 새 왕의 총리·외무장관·국제연합(UN) 상임대표를 지냈다. 5년 뒤인 1960년 4월 3일 아버지가 죽자 그 뒤를 이었는데 스스로를 왕이라는 칭호 대신 국가원수라고 칭했다.

그는 중립주의 외교정책을 내세웠다. 북베트남이 크메르 공산당(크메르루주)을 지원하지 않는 대신, 베트남 공산주의자가 캄보디아 동부지역을 기지로 하여 은밀히 작전하는 것을 묵인했다. 미국의 원조를 배제하고, 좌·우 양파의 급진주의자를 통제하고자 노력하여 캄보디아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그가 온건정치를 편 15년 동안 다른 많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격변을 겪은 데 반해 캄보디아는 다소 불안하기는 해도 비교적 평화로웠고 번영을 누렸다. 1970년 미국의 지원을 받은 론 놀 장군이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쫓아내자 캄보디아도 베트남 전쟁에 더이상 중립을 지킬 수 없게 되었다. 그뒤 그는 베이징[北京]에 살면서 크메르루주 지하운동의 대변자로 활동했다.

1975년 크메르루주가 캄푸치아를 장악한 뒤 고국에 돌아왔으나, 크메르루주 정부는 그를 가택에 연금했다. 1979년 1월 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한 크메르루주 정부는 UN에 나가 크메르루주를 옹호하라고 그를 석방했다. 그는 베트남군의 침공을 고발한 뒤 크메르루주와도 관계를 끊었다. 1982년 그는 베트남을 등에 업고 있는 중앙정부에 반대하는 3대 세력인 크메르루주, 반공산당 크메르 인민민족해방전선, 시아누크 중립주의 캄푸치아 민족해방운동으로 불안정하게 구성된 연립망명정부의 대통령이 되었다. 계속해서 저항운동의 지도자로 활동하다가 1991년 과도정부인 캄보디아 최고민족평의회 의장에 선출되었다.

1993년 5월 UN이 주관하는 총선거가 실시되었고, 이 선거 결과에 따라 구성된 의회는 그 해 9월 군주제 복귀를 의결하고 시아누크를 다시 왕위에 앉혔다. 그의 아들 노로돔 라나리드는 제1총리가 되었다. 그러나 1997년 7월 제2총리인 훈 센이 쿠테타를 일으켜 라나리드를 축출했다. 1998년 시아누크의 중재로 라나리드와 훈 센은 연립정부 구성에 합의하고 훈 센은 총리, 라나리드는 국회의장을 맡았다